'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가 삶 가운데 불어오는 풍랑의 실체를
바로 알고 이해하면
어떤 풍랑도 능히 이길 수 있다.
인생은 어렵다.
그래서 고해(苦海)라 말한다.
이전에도 어려웠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도 어렵고 저기서도 어려운 것이 인생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미풍이든 역풍이든, 광풍이든, 늘 불게 마련이다.
그래서 풍랑이 없는 인생을 바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잘못된 기대이다.
인생여정은 늘 '폭풍전야' 같다.
요즘은 코로나 전염병의 세계적인 확산으로 인한
모든 일상적인 활동의 중단과 경제활동의 위축,
그리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의 풍랑도
광풍에 가깝다. 서민은 서민대로 부유층은 부유층대로
광풍에 견디기조차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일상이 쓰나미 앞의
부평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루를 살아냄이 이적이며 축복이다.
온통 지뢰밭 같고 얇은 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이와 같은 때에 누구를 의지하며 어디가 안전할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풍랑이 미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의 풍랑은 거의 광풍수준이다.
광풍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아무 예고 없이 갑자기 불어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광풍을 제어할 힘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광풍의 대상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자든 불신자든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타고 가시던 배도
풍랑을 만나지 않던가?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이랴!
그러면 우리가 풍랑을 만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바로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풍랑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풍랑과 부딪히거나 싸우려고 하면
완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풍랑의 배후에는
원수가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자살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고 있으며
도미도 현상까지 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42명이 자살을 한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숫자다.
물론 자살하는 자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고충과
이유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의 자살 도미도 현상은
결코 심상치가 않다.
예전에도 어렵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우울증이 없었던가?
예전에는 스트레스가 없었던가? 아니다.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양상만 다를 뿐이지
문제와 스트레스는 동일하다.
어쩜 예전이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요즘 들어
자살하는 자들이 부쩍 늘어나는가?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말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사실은 자살의 배후에는 원수의 역사,
즉 자살을 충동하는 영적인 존재가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귀는 '죽이고 빼앗는 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반대로 성령은 '살리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즈음에 자살하는 분들 중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 될 때 마다 마음이 아리고 시리다.
자살 외에도 풍랑은
사람과 교회와 가정을 가리지 않고 몰아치고 있다.
부부싸움, 가정해체, 혈기,
음란, 이간질, 폭력, 살인 등..
각종범죄의 배후에는 반드시
원수들이 역사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예수께서 광풍을 만나셨을 때 돛대를 높이라거나
노를 좀 더 열심히 저으라고
제자들을 다그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풍랑을 향해 '꾸짖으시며 잠잠 하라!'고
명령(命令)하셨다.
이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어떤 문제나 겉으로 드러난 현상들과 직접
부딪혀 싸우거나 상대하지 말고
그 배후에서 도사리고 역사하는 마귀를 대적하라.
결국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이름의 권세뿐이다.
풍랑이 없는 순풍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격한 풍랑을 잔잔케 하며 뚫고 나가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이며 복음의 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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