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새들에게 상처 없는 새가
한 마리도 없듯이 인간도 그러합니다.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로 상처를
안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자아와,
상처 받은 또 다른 내가 공존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다르고, 저기서 내가 다르고,
오늘 내가 다르고, 내일 내가 다르고..
군중 앞에서와 홀로 있을 때의 내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사람도
사실은 속을 헤집어보면 상처투성이 입니다.
어쩌면 자기 안에 있는 많은 상처들을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겉으로는 강하고 당당한척
위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열등감이나,
자존감 상실에 시달려서 바짝 움츠리든지 아니면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한척하며 포장하고 삽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처를
감추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러난 상처든 침전된 상처든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원수가 역사할
빌미를 제공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건강한 자아를 굴절되게 하여 늘 수심과
어둠에 사로잡혀 창의성과 긍정성의 부재로
패배주의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성향에 따라 자신을 학대하든지 아니면
타인을 공격하든지 둘 중에 하나로 움직이게 됩니다.
또한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물림 된다는 사실이 무서운 파괴력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 몸 어디가 아프면 반드시
타인에 대하여 넉넉하지 못하고 배려감이 감소합니다.
내가 아파 죽겠는데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하든지
내 맘에 안 드는 언행을 할 경우에 내 안에 상처는
그 사람을 공격하게 합니다.
때론 잔인하고 무정하게 말이죠.
그럴 땐 자신도 놀라고 타인도 함께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괜히
짜증을 많이 내는 것이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내면의 아물지 않은 상처는
반드시 남에게 보복성 상처를 잘 줍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해
또 다시 상처로 되갚음을 하는 것이지요.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치유 받은 상처는 영광과 성숙됨의 자원이 됩니다.
그러나 아물지 않은 상처는
자신과 남을 동시에 공격하기에 내면의 상처는
반드시 치유를 받아야 하는 숙명적 과제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자들은 평소에는
그렇게 인격적이고 온유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돌변하여 야수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무엇인가 그 사람 내면의
상처를 건드린 순간입니다.
그 상처를 감추려고 본능적인 방어의 수단으로
자기상처를 건드린 자를 잔인하게 반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고 짜증을 내고
까칠하게 구는 이유는 바로 내안에 잠재되어있던
상처가 드러난 것입니다.
부모에게 상처가 있으면
자녀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됩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상처를 받아본 자가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적게 받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천복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예수로 치유 받은 자를 만나는 것은
만복입니다.
그만큼 위로자, 격려자,
치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사랑하는 교우들을 위해서,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해서라도
나의 상처를 먼저 적극적으로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공하거나, 리더가 되거나,
부모가 되거나, 결혼을 하면 그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식 속에 있는 상처도 치유 받아야 하지만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상처 또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육신의 질병도 치유하시지만,
마음의 병과 온갖 상처도 치유하시는
만병의 의사입니다.
상처는 아프지만 흉터는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상처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흉터를 소유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상처를
예수의 흔적으로(갈6:17)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상처 많은 자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을 소유한 하늘의 스타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