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제는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내려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더 움켜쥐고 살려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분'
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린 날마다 자신의 짐을 자기혼자 지려고 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물질이나 세상과학의 힘보다 무능하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린 은행을 믿고 생명같이 여기는 돈을
은행창구에 내려놓는다.
우리는 학교를 믿고 생명보다 귀한 자녀들을
학교에 내려놓는다.
우리는 병원을 믿고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내어 맡긴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환자들을 보라.
얼마나 의술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며
의사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가?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하라'
고 생명과 몸을 내어맡긴다.
그러니까 수술대 위에다 모든 걸 내려놓는 것이다.
수술대 위에 위에서 걱정한들 고민한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환자와 가족들이 발가벗듯이 내려놓지 않으면
의사는 조금도 환자를 치료하거나 칼을 댈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우리의 믿음이 '환자가 의사선생님을
신뢰하는 것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내려놓음'은 죽기 위함이 아니라
살기 위함이며 '내려놓으라!' 함은
망하게 하심이 아니라 복을 더하려하심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순간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게 다 맡기라'
'내려놓으라'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주저주저하며
예배와 기도를 통해 내려놓은 짐을 예배와 기도
후에는 주섬주섬 다시 주워 담아 짊어지고 간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보다는 그래도
내가 짊어지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서 끙끙 앓다가 죽을지언정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을 쉽게 실행하지 못하는 게
우리 믿음의 현주소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내려놓음'에 있다.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인들은
가능한 짐을 가볍게 한다고 들었다.
식량도 가능하면 농축된 우주식량을 가지고 간다.
우주선을 가볍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래야 멀리 빨리 날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경기하는 운동선수에 비유했다.
운동선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운동선수가 잡다한 것들에 얽매여있으면
좋은 기록을 낼 수 없다.
운동선수는 오직 푯대(목표)를 향해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요즈음 내려놓지 못함으로 하루가 천년이며
어깨가 천근인 분들을 부쩍 자주 본다.
마귀는 어떻게든 우리에게 짐을 지게 한다.
걱정의 짐, 두려움의 짐, 불안의 짐, 질병의 짐,
궁핍의 짐, 자녀에 대한 짐.. 등 모든 짐을 '절대로
내려놓지 말고 스스로 짊어지라' 고 권하고 미혹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순간순간
'우리의 모든 짐을 주께 맡기라'고 권고하신다.
'맡긴다'는 말은 '위탁 한다' '양도 한다'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의뢰 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의 짐을
강제로 빼앗아 짊어지시지는 않는다.
우리가 내려놓는 짐만 져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내려놓음'은 능력이며 '복음의 야성'이다.
부부문제를 내려놓으라.
자녀문제도 내려놓으라.
결혼문제도 내려놓으라.
물질문제도 내려놓으라.
건강문제도 내려놓으라.
미래문제도 내려놓으라.
때로는 부귀영화도, 특권도, 기득권도, 명예도,
부(富)도, 인기도, 편안함도 주님 발 앞에다 내려놓으라.
'비움'과 '내려놓음'이 믿음이며
그 열매는 '자유와 평안과 영광'이다.
'움켜쥠'과 '끌어않음'과 '쌓아놓음'은 불신이며
그 열매는 억압과 스트레스와 종의 삶뿐이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음'으로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도 자기의 것을
비워 주님 손에 '올려 드림'으로 일어났다.
'내려놓는 자의 복'을 구하고 '비움의 은사'를 구하자.
축복(祝福)은 '내려놓음과 비움'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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