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밖에 살수 없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내일이 있다고 이해시키고 믿어라 해도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고, 믿고, 그래서
내일을 준비하고 살아갈 확률은 0%일 것이다.
요즘 인간들의 삶을 보노라면 하루살이가 생각난다.
마치 이 땅의 삶이 전부인양
오늘 하루를 위하여 전력질주를 한다.
그래서 다투고, 싸우고, 절대로 손해 안 보려하고
더 많이 움켜쥐려 하고 더 많이 얻으려 한다.
'이생이 전부' 라고 믿기 때문이다.
저들에게 내세를 위하여 넉넉한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손해보고, 나누며, 양보하고, 베풀며 살라고
하는 말을 이해시키거나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오늘을 건드렸다가는
큰 일이 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기의 역영을 침범하면
공격하는 맹수처럼 돌변한다.
그래서 돈(재산)때문에 부모를 해치기도 하고
형제지간에 법정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물며 타인이랴...
이렇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왜? 영생과 영원한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하루살이 인생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럽다.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영(靈)을 모르면
육의 삶으로 충만하여 요동치 않는다.
육의 삶이란
내세를 관념적으로 믿고 현세에 안주하여
세상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다니되
주님의 방식으로 삶을 살지 않고,
세상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천국이나 내세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팍팍하고 옹졸하게,
유치하고 아옹다옹 하며 살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영으로 모르면
"여기가(세상과 지금의 현실)좋사오니.."이다.
그래서 필요이상의 욕심을 부리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다.
저들에게 영과 내세에 대하여 아무리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설명을 해도 알 도리가 없다.
영적인 세계는 교육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의 특징은
은사의 유무가 아니다.
열심의 유무도 아니다.
직분의 유무도 아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의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변화와 거듭남의 여부와
삶의 목적에 관한 문제이다.
바울은'나는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했다!'
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은 현세에 별 애착이 없었다.
욕심 부릴 것도 내려놓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바울의 삶은
늘 자족하는 삶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소속이 세상"이다.
세상의 삶, 즉 보이는 세계가 전부이다.
그러므로 천국을 준비하거나
죽은후에 삶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거저 당장만 잘 먹으면 되고, 죽을 때 죽더라도
움켜쥐고 쌓아놓고 사는 것이다.
하루살이 마인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다르다.
모든 삶의 포커스를 천국에다 맞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날에 받을 면류관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막~ 대충대충 적당히 살수가 없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이다.
더 많이 내려놓아야 하고, 더 많이 손해보고,
더 많이 베풀어야 하고, 더 많이 희생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삶은 노력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매임(강권하심)으로 가능해 지는 것이다.
아마 요즈음 사람들에게 예수 믿어
천국 가자고 그러면 비웃을 것이다.
여기가 천국인데.. 우리 집이 천국인데..
내 삶이 천국인데..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데..
즐기고 누릴 것이 얼마나 많은데.. 고리타분하게
천국이니, 내세니, 그런 말을 하냐고..
그러나 상당수의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몸은 교회에 머물지만 생각과 마음은
세상에 속해서 육신의 코드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종교심으로 육을 코팅한 채..
이제 우리는 위선의 코팅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주 앞에
나의 소속과 실체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하루살이 인생을 벗어날 수 있으며
혹시 죽음이 홀연히 임할지라도
영광중에 부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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